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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nologue

기억

상처에 물이 닿으면 쓰리고 아프듯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도 비가 오면 더 아프다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오늘은 유독.

억새밭을 헤치며 한없이 한없이 깊은 산 속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아버지는 어린 나를 안고 울고 계셨다. 미안하다했다. 그저 미안하고 미안하다고 그 말만 되풀이 하셨다. 정말 우습게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생을 마감하려 한다는 것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 내며 '아빠 울지마. 나는 괜찮아.'라고 했던가. 깊이 아로새겨진 한을 삼키며 짐승처럼 목울음을 토해내던 가엾은 내 아버지.

그 때의 기억은 자라는 동안 나에게 상당한 영향을 줄 만큼 중대한 것이었으나 혼란스러웠다. 정녕 진실일까. 꿈 또는 상상이 아닐까 _ 가슴 속에 그 기억을 품고 있는 내내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내 나이는 고작 세 살이었으니까. 우연히 보게 된 아버지의 일기를 통하여 현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신기하게도 잊혀져있던 것까지 모두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퍼즐 조각 맞추 듯 맞춰지는 기억과 직면하던 그 날 나는 밤새 고열에 시달렸다. 아팠다. 아무도 내가 왜 아픈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며칠을 앓았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면 무겁게 짓누르던 그 날의 공기와, 비릿한 눈물냄새가 생각난다. 미세하게 느껴지던 아버지의 떨림까지도. 차라리 영악한 계집 아이의 상상이었기를 바라지만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잔인하다.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_ 피로 범벅된 상처투성이 가슴을 안고서라도 살아가야 한다면. 애써 떨치려 했지만 떨쳐지지 않았던, 혼자서 감당하기에 벅찼던 무겁고 차가운 기억을 이제는 내려놓고 싶다. 편안해지고 싶어.



「잊어버리고 싶고 혹은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었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기억, 너무 아파서 가슴이 아려오는 기억, 영원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나의 뇌는 새로운 기억들을 받아 들이면서 예전의 기억들을 하나 둘 씩 밀어내고 있는데 지우고 싶은 그 기억만은 저장 창고에서 빠져나가질 않는다. 하지만 좋은 기억들을 많이 만들면 아픈 기억들은 점점 사라지겠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 갈 수 있는거야.」


bgm// Jim Chappell - Lullaby